Sunday, May 4, 2008

The Battle of Cannae (BC 215)

한니발(Hannibal)이 54,000의 군사로 87,000의 로마군을 포위하여 괴멸시킨 전쟁사에 길이 남는 전투로, 이 전투이후 로마는 스키피오가 등장하여 공세로 전환하기전까지는 한니발에게 전투의 기회를 주지않으려고 피하기에 급급했다.

1차 포에니전쟁(Punic War)의 패전이후 Spain을 기반으로 국력을 키운 카르타고의 Hannibal은 로마군의 허를 찔러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군한다.



Trebia와 Trasimene에서 패한 로마군은 매우 당황하고 Canae전투에 모든 물량을 투입하게 된다. 로마는 확실한 승리를 원했다. 그러나...



Hannibal의 군사는 54,000 vs 87,000으로 숫적인 열세에 있었으나 기병에서만은 우위에 있었다. 파란색의 Hannibal은 약한 군사를 중앙에 위치시키고 강한 군사를 좌우에 위치시킨다.



1. Hannibal의 약한 중앙은 뒤로 밀리며 후퇴하고 강한 좌우는 자리를 지킨다.
2. 주력부대로 측면을 치게한다.
3. 우위에 있던 Hannibal의 기병은 로마기병을 패퇴시키고 돌아와 로마군의 배후를 친다.

이렇게해서 적은 군사에 많은 군사가 포위되는 로마인들로서는 전략적으로 절대로 발생하지 않았어야 했던 일이 발생한것이다.



고대전투에서는 방패로 몸을 방어하기에 평범한 전면전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가 힘들다. 그런데 둘중 한편이 panic상태가 되어 군대 전체가 자기 한몸 살리기에 급급하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 상황이 바로 그 상황이다.

상상해봐라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동료들은 비명소리와 함께 죽어넘어가고 앞에서 무슨일이 생기는지 가운데 있는 사람은 알길이 없다. 그야말로 panic이다. 이 시점부터는 더 이상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라고 불리는 편이 옳다.

이 전투에서 87,000중 60,000-70,000의 로마군이 죽거나 포로가 된다. 그러나 그 당시 10대로 참전했던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는 살아남아 후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Africanus란 이름을 얻는다.

The Battle of Gaugamela (BC 331)

Issus에서 패한 페르시아의 Darius 3세는 모든 물량을 동원해 Gaugamela에서 제국의 운명을 건다.

Issue는 좁아서 대군을 활용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Gaugamela는 넒은 평지여서 몇배의 군사와 전차를 가진 페르시아에게 유리한 장소였다.

다리우스는 먼저 전차부대(chariot)를 진격시킨다. 고대전투의 탱크이다. 이 무시무시한 chariot을 보라.


그러나 알렉산더는 천재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Chariot이 진격할때 |_| 모양으로 병사들을 배치해 그 안으로 전차를 한대씩 유인해 괴멸시키는것이다. |_| 로 배치된 병사들은 긴창을 쳐들고 있으니 말이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갈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전차부대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못하고 괴멸됐다.

이 방법때문에 이후로 전차부대는 전쟁터에서 사라졌다. 나중에 로마의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코끼리부대를 상대할때 응용한다. 병사를 | |로 배치해서 그 사이로 코끼리가 그냥 지나가 버리게했다.



알렉산더는 중앙의 부대를 우측으로 이동시킨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자신의 중앙에 gap을 만든다.



그 gap을 노리고 페르시아군이 진격해오자 페르시아군에도 중앙에 약간의 빈틈이 생긴다. 그 빈틈을 놓치지않고 알렉산더가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고 중앙에 있던 Darisu 3세는 놀라 도망간다. 그것으로 제국의 주인이 결정이 되었다.

The Battle of Issus (Nov 333 BC)





Kingdom of Heaven의 시대배경 (펀글)

[역사] 'Kingdom of Heaven'의 시대배경 정리

십자군원정 초창기, 당시 이슬람 세계는 단결하여 공동의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정세가 아니었다. 이슬람 세계는 문화적 / 경제적으로는 팽창하였으나 정치 / 군사적으로는 분열되었다. 시리아에는 두 개의 셀주크 투르크 왕족 분가가 각각 알레포와 다마스커스에 웅거하여 서로 적대하고 있었으며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이미 쇠망기에 들어섰다.

그런 사정으로 이슬람교도는 시리아, 팔레스티나를 십자군 병사의 지배에 넘겨주고 말았다. 에뎃사를 중심으로 하여 에뎃사 백령이,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하여 안티오키아 후령이, 그리고 예루살렘왕국이, 조금 뒤에는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하여 트리폴리 백령이 성립되었다.

이후 80여년동안 시리아 및 팔레스티나에 거주하게 된 프랑크인은 어느 정도 이슬람 세계에 동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상당히 현실적으로 정세를 판단할 수 있는 심리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서야 광신적인 십자군 열기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구의 새로운 열심당들이 꾸역꾸역 재화가 넘쳐난다는 동방으로 향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문제였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처했던 것이 영화에 등장하는 국왕 보두앵과 티베리아스 백작 등의 견해였다. 그들은 이슬람 세력과 공존함으로서 그들이 구축한 국가를 유지하고 싶었으며 그런 한도내에서 서구의 원군의 도움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영토에 대한 욕망과 중세의 광신을 그대로 지닌 채 약속의 땅에 도착한 서구의 열심당들은 - 기 드 루지앙과 레이날드 등 - 그런 유화책을 증오하였으며 전쟁을 벌여 이교도를 몰아내고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싶어하였다.

이미 전성기를 지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정권은 극도로 쇠퇴하였다.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의 지배자로서 이슬람 실지 회복의 영웅으로 군림하던 군주 누르 엣딘은 그가 신뢰하는 부장 시르 쿠프를 파견하여 파티마 왕조의 정권통제를 맡겼다. 1169년 그는 파티마 왕조의 재상 지위에 올랐으나 곧 병사하고 그의 조카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인물이 바로 이슬람의 지주가 된 사라 앗딘(살라딘)이다.

1171년 파티마 왕조 최후의 칼리프가 숨을 거두자 살라딘은 중망을 업고 술탄의 지위에 올라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 파티마 왕조는 당시 이슬람 주류와는 다른 계열에 속했던 왕조였으며, 살라딘은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충성서약을 함으로서 이슬람 세계 전체의 세속군주로 인정받으려 노력하였다 -

그 2년 후 그의 주군 누르 엣딘이 죽자 그는 다마스커스 및 시리아 방면에 대한 행동의 자유를 선언하고 이듬해 다마스커스를 점령하였다. 대체로 1185년경까지 살라딘은 유프라테스강에서부터 나일강에 이르는 시리아 및 이집트 전체의 통일군주가 되었다. 이제까지 이슬람측의 내분으로 덕을 보고 있던 시리아, 팔레스티나 연해지역의 여러 프랑크인 국가들은 이제 중대한 위기를 맞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아직 얼마동안은 우호 관계가 지속되었지만 메카의 대상을 약탈하는 프랑크측의 경거망동으로 양자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게 영화에 등장하던 루지앙과 레이날드의 대상 습격 장면이다. 1187년 여름 예루살렘 왕국 군은 총력을 다해 갈릴리 지방의 제압에 나섰으나 갈릴리 호수 서안의 하틴 고개에서 살라딘의 군대에 포위되어 염천하에 급수가 끊기고 게다가 화공까지 당해 힘없이 항복하였으며 예루살렘 국왕은 포로가 되었다.



이 하틴의 전투 이후 살라딘은 아콘, 야파, 베이루트를 차례로 공략하고 10월 초에는 예루살렘의 성문 앞에 서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문을 열었다. 88년 전 7만여명의 이슬람교도를 학살한 제 1차 십자군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대조적이었다. 이번에는 살육도 약탈도 파괴도 없었다. 그리스도교도는 남자가 금화 10닢, 여자가 5닢, 아이들은 1닢의 몸값을 지불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빈민이나 전사자의 과부와 고아에게는 살라딘이 사재를 털어 몸값을 지불해 주었다.

믿을 수 없는 대접을 받은 것은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비롯한 그리스도교회의 최고성직자들이었다. 영화에서 개종해서라도 목숨만은 건지려는 추잡한 행보를 보이던 주교는 이들 세속교회의 풍경을 집약한 모습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값만을 지불하고는 금은재보를 짐수레에 산처럼 싣고서 지체없이 물러가고 말았던 것이다. 살라딘의 관용 앞에서 그들의 마음은 부끄럽지 않았을까?

"바위의 대성당" 위에 세워져 있던 황금의 대십자가는 철거되었다. 성벽에는 살라딘의 깃발이 나부꼈다. 성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의 수중으로 회복되었다. 프랑크인은 이제 티루스, 트리폴리만을 영유하게 되었다.

현지 프랑크인의 긴급원조 요청에 따라 역사상 유명한 제 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붉은 수염"왕, 프랑스 필립 2세 "존엄"왕, 영국의 리처드 1세 "사자심"왕이 이끄는 십자군이었다. 그러나 "붉은 수염"왕은 소아시아 반도의 강을 건너던 중 익사해버렸고, "존엄"왕과 "사자심"왕은 극도의 경계심으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로로 팔레스티나로 향했다.

1189년 이후 현지의 프랑크군은 살라딘이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아콘을 다시 빼앗고자 군사행동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곳에 도착한 두 왕의 군대는 투석기와 사다리 등의 공성무기를 갖고 있었고 프랑스와 영국의 함대는 제해권을 장악하여 해상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살라딘의 원군도 헛되이 수비대는 항복하였다.

프랑스 왕은 영국 왕에게 세력이 미치지 못하자 귀국해 버렸으며 "사자심"왕 리처드는 살라딘과의 협정을 무시하고 포로 2천7백 명을 처형한 후 곧장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변함없는 십자군의 잔학성에 살라딘은 분노하였다.

이후 1192년 9월에 정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살라딘은 리처드 1세와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여 리처드 왕의 중무장기사와 궁수대의 협동작전에 늘 고전하였지만 전략적으로 리처드 군의 움직임을 잘 막아냄으로서 결국 예루살렘 성벽에도 접근치 못하게 방어하였다.

살라딘은 팔레스티나 연해지역의 지배권과 성도 예루살렘으로의 순례통행권을 3년간에 한해 프랑크인에게 인정해 주었다. 이듬해 살라딘은 다마스커스에서 세상을 뜨고 "신" 예루살렘 왕국은 다시 1세기 정도 존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 팔레스티나에서의 "프랑크인",즉 서방 그리스도교도의 위협은 사실상 여기서 소멸되었다.

그 후로도 수 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후 십자군의 행보는 탈선과 헤프닝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제국을 침략하고 광신과 무지의 합작품인 소년십자군의 비극을 일으켰으며, 서구 각 국가 국왕의 야심에 의한 독자적 십자군 출병은 무익한 전투만 계속했을 뿐 성과가 없었다.

이후 1250년에 이집트의 술탄이 투르크 용병에 의해 쫓겨나게 되고, 살라딘이 세운 아이유브 왕조 대신에 마물루크 왕조가 성립되었다. 마물루크 왕조는 시리아로 대군을 파견하였고, 안티오키아 제후국은 1268년에, 트리폴리 제후국은 1289년에, 잔존한 최후의 기독교도의 거점 아콘도 또한 1291년에 상실됨으로써 서유럽의 기독교도들은 근동의 이슬람세계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다.

이것이 십자군운동의 종말이었다...

by 붉은10월, 2005-05-13 21:49

살라미스 해전 - 아르미안의 네딸들



여동생이 순정만화를 자주 빌려봤다.

왜 이런걸 빌려오냐고 구박하면서도 본전을 뽑기위해 나도 같이 읽곤했다.

그러나 잘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순정만화는 없었다. 아르미안의 네딸들을 보기전에는...

대학교 2학년때 써클룸에 있는데 여자애들이 독수리만화방에서 아르미안의 네딸들을 빌려왔다.

무슨 대학생들이 만화책을 보냐고 구박했더니, 여자애들이 읽어보라고 강권한다.

난 잘 모를땐 확인하기위해 꾹 참고 시키는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뭔가 있으니까 권하겠지...

글씨가 워낙 많은지라 힘겹게 읽고있는데 여자애들은 벌써 다 읽고 반납해야한다고 한다.

신화와 격동하는 역사가 얽힌 엄청난 스케일에 완전 빠져서 결국은 내가 다 읽고 반납하기로 했다^^

이 만화는 살라미스해전(BC480) 전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페르시아, 아테네...

페르시아의 키로스대왕(성경에 고레스)은 종주국인 메디아를 뒤엎고 대제국을 건설한다. 페르시아 이전에도 히타이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등 비교적 큰 제국은 있었다. 그러나 이전 제국들은 정복지를 다스리기보다 때가되면 나타나서 세금을 걷어가고 말안들으면 군사력으로 박살내는 한마디로 깡패국가였다. 페르시아는 최초로 광대한 정복지를 행정구역에 포함시키고 총독(satrap)을 파견시켜 다스린다.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제국이다.

키로스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원정에서 병사하고 한때 상당히 혼란한 시기가 있었다. 그것을 평정한 사람들이 다리우스, 오타네스, 그리고 나머지 5명...

그중 다리우스가 왕이 되는데 키로스대왕과 같은 아케메네스가문이라는 이유로 왕으로 추대된것이 아니다. 누가 왕이 될지 정하기위해 경주를 했는데 다리우스가 이겼다고한다.

그러나 오타네스는 이 경주에 참여하지않고 누가 경주에 이겨서 왕이되든지 그에게 지배당하지않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BC484 ㅡBC425)의 "역사"에 나오는 오타네스의 연설이다.

"동지여러분, 이렇게 된 이상 추첨에 의해서 정하든, 혹은 페르시아 국민들로 하여금 선택케 하든, 아니면 그 밖의 다른 방법을 쓰든 여하튼 우리들 중 한 사람이 왕이 될 수밖에는 없을 것 같소. 그러나 나로서는 그대들과 왕위를 다투고 싶은 생각이 없소. 나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배받기도 싫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나는 지배자의 지위는 단념하겠지만, 단 거기에는 조건이 있소. 그것은 나는 물론 내 자손 대대로 그대들 가운데 어느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오"

7명이 대등했었는데 그중 다리우스가 왕이 되었으므로 초기에 왕권은 비교적 약했을테고 다리우스왕은 나머지 6명에게 함부로 할수 없었으리라.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그중 한병이 왕을 만나러갔다. 시종이 왕이 왕비와 동침중이라 만날수없다고 했다. 시종의 말을 거짓말이라 생각했는지 그의 코와 귀를 베어버리고 들어가보니 왕망하게도 왕은 정말 동침중이었다.

다리우스왕도 함부로 할수없는 사람이기에 심각한 회의가 열렸고 결국 처형당한다.

어찌했던 오타네스는 왕에 필적할만한 권력을 갖는다. 오타네스 가문과 다리우스왕가는 계속 혼인으로 맺어진다.

대제국 페르시아의 2인자 오타네스의 외아들 "리할"이 첫째딸 레마누의 운명의 상대이다.

호전적인 다리우스왕은 BC 490년 아테네를 침공한다.

스파르타에 구원을 요청하나 스파르타는 무슨 종교행사중이어서 못돕는다고 통보한다. 핑계가 아니다 그리스애들은 원래 그렇다. 혼자서 싸우게된 아테네는 예상을 뒤엎고 마라톤전투에서 두배가 넘는 페르시아군을 참패시킨다. 스파르타가 종교행사를 끝내고 불이나케 달려왔을땐 이미 전투는 끝나있었다.

페르시아는 복수를 다짐한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성경에 아하수에로, 재위 BC 485∼BC 465)가 왕위에 오른다.
그가 두째딸 "와스디"의 운명의 상대...
BC 481년 백만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한다.

아테네의 테미스토글레스는 육지를 버리고 섬으로 이주, 해전에 모든 운명을 건다.
아테네의 도시와 신전은 페르시아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나중에 이것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정복의 명분으로 삼는다.

테미스토글레스의 계략에 빠진 페르시아의 해군은 대군을 활용할수없는 좁은 살라미스로 진격하게 되고, 그리스 해군에 의해 그야말로 박살이 난다.

해전에서의 패배는 바다로 운반되는 백만대군의 보급 차단을 의미한다. 크세르크세스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갈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이기면 당연하고 지면 망신인 전쟁에서 두번이나 패하고만다.

이후 테미스토글레스의 영향력은 상상할수 있으리라. 그런데 억울하게도 이 구국의 영웅은 도편추방된다.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때문이다.

그 다음의 실권자가 아테네의 황금기를 연 페리클레스(BC 495?∼BC 429) 이다.
3째 "아스파샤"의 운명의 상대...
네딸중 "아스파샤"만이 확실한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와스디는 성경에 나오니 실존인물일수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없다.

왕후 와스디가 처형되고 에스더가 크세르크세스의 다음 부인이 되었다고 구약 에스더서에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공부많이한 만화가 신일숙은 에스더도 이 만화에서 잠깐 언급한다.

페르시아가 배경이 되는 에스더서나 다니엘서를 읽어보면 성경의 역사적인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페르시아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종교에 상당히 관대했는데 성경에서 묘사된 페르시아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다. 게다가 크세르크세스의 부인이 마치 하나밖에 없는것처럼 그려지고있다.

어찌했던, 아르미안의 네딸들의 중반까지는 정말 완벽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패턴인 "순정"을 여실히 드러낸다. 중반까지 너무나 많은 일을 벌려놔서 거의 수습불능인것을 "순정"으로 해결한 느낌도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않는 일편단심의 남녀들이 희생으로 모든 일을 해결한다.

여성들이여 꿈깨고 현실에 적응하라.
순정만화와 하인틴로맨스를 읽으며 꿈속에서 살던지...

大 고구려

이것이 고증된 고구려의 영역이다. 물론 모두 다 고구려의 영토는 아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수륙양동작전으로 정복하고 백제왕의 항복을 받는다.
그러나 조공만 받고 영토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금관가야, 왜 연합군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고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그 영역을 신라에게 넘겨준다. 신라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다..

거란을 정복하고 거란을 배후로 후연을 정복한후 후연에 포로로 잡혀갔던 고구려 사람을 왕으로 세운다. 괴뢰정부인 것이다

이것이 광계토대왕시대 고구려의 방식이었다. 중국이 그러했듯이 제후국들을 만드는것이다..



이것이 정복순서이다. 광계토대왕은 그냥 무작정 정복한것이 아니라 큰 비젼을 갖고 계획적인 정복사업을 벌였던것이다.



단순한 땅따먹기가 아니었다. 이로서 동북아시아 최대의 시장을 확보하고 중계무역권을 장악한것이다. 심지어 고구려는 해군으로 서해를 가로막고 직접적인 무역을 가로막았다... 사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입, 멸망시킨 가장 큰 이유는 고조선의 우거왕이 길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었기때문이다.



고구려가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분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학자들은 해발 1700미터에 달하는 대흥안령산맥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대흥안령산맥의 정상이다. 실제로는 그냥 계속되는 평탄한 초원이어서 높기는 하지만 전혀 장벽이 되지못했다.



지두우를 정복함으로써 실크로드에 접근할수 있었다. 고구려 벽화에 서역인이 나오고, 서역벽화에 고구려사신이 나온다. 그리고 서역의 악기와 페르시아의 곡예가 고구려 벽화에 등장한다.



백제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은 고구려왕은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다. 북위로 하여금 고구려의 배후를 치게 조정하다가 발각되어 장수왕의 보복을 받은것이다.

사실 고구려 전성기 영역은 고조선의 영토와 많이 일치하나,
이 모든 영역을 전부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것은 무리가 있다.
상당히 일시적인 지배였기때문이다.

요동지방은 고구려멸망이후 상실하나, 만주지방 발해가 계속 지배하고 연해주까지 넓힘으로써 사실상 점령한 영토개념으로 볼때 발해는 고구려보다 더 넒은 영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만주지방인 중국 길림성은 조선족이 대다수를 이룬다.
조선족들이 사용하는 특이한 고구려식 온돌, 창고들이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그것들과 같다는데 너무나 놀랐다.
고구려 멸망후 1300년동안 서민들의 생활은 변한게 별로 없는 느낌이다.

지금도 고구려 옛성주변에 사는 조선족들은 거기서 출토되는 고구려시대의 돌절구를 가져다가 사용한다고 한다. 집집마다 하나씩 있고, 다른 민족들은 돌절구를 안쓴다고 한다.

만주에 조선족이 많은것은
조선시대때부터 청나라가 자신의 발흥지인 만주지방을 비워두고 중국본토로 몰려갔던 탓도 있고
일제시대때 만주로 많이 건너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고구려식 생활방식이 유지된 이유는 정말 모르겠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백두산 정계비도 있고...
만주는 우리 영역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충분하다.

중국이 일본과 그런 조약을 맺은것도 이지역이 다분히 분쟁지역이었기때문이었을것이다.

역사 스페셜 4회 - 고구려군, 아차산 최후의 날

4세기 중엽 백제의 전성기 근초고왕때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전사한다.

그후 5세기초 고국원왕의 증손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 아차산을 기지로 남진정책을 추진한다.

이당신 삼국의 역학관계는 다음과 같다.

광개토왕때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약소군 신라는 고구려편에 붙는다.

이에 백제는 가야, 왜와 연합하고, 가야 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 점령하나 고구려(광개토대왕)의 원군에 의해 격퇴되고 금관가야는 멸망한다.

고구려는 신라의 왕위계승문제까지 간섭하여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올린다.

고구려로부터 벗어나려는 눌지왕은 433년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는다.

신라의 실직성에서 고구려장수가 살해되고, 경주에 주둔하던 고구려군 백여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이 즈음 백제는 중국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국서를 보내는데,
강력한 고구려를 두려워한 북위는 이를 거절하고 국서는 고구려의 손에 들어간다.

이에 분노한 고구려(장수왕)는 한강을 건너 백제에 쳐들어가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유역을 차지한다.

이때부터 이름뿐이었던 나제동맹이 실질적인 군사동맹으로 발전되고 70여년간 팽팽한 대치상태를 유지한다.

이때 고구려의 최전방이 아차산이었는데, 551년 고구려의 내분을 틈탄 나제 연합군의 기습공격으로 무너지고, 한강유역을 상실한다.

신라의 한강유역에 대한 욕심으로 나제동맹은 깨지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 시작된다.

초반에는 백제군이 승리했으나 군사를 격려하려고 소수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이동하던 백제의 성왕이 신라의 기습공격에 전사하며 전세는 반전되어 백제는 한강유역을 영원히 상실한다.

신라는 언제나 정정당당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