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4, 2008

Kingdom of Heaven의 시대배경 (펀글)

[역사] 'Kingdom of Heaven'의 시대배경 정리

십자군원정 초창기, 당시 이슬람 세계는 단결하여 공동의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정세가 아니었다. 이슬람 세계는 문화적 / 경제적으로는 팽창하였으나 정치 / 군사적으로는 분열되었다. 시리아에는 두 개의 셀주크 투르크 왕족 분가가 각각 알레포와 다마스커스에 웅거하여 서로 적대하고 있었으며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이미 쇠망기에 들어섰다.

그런 사정으로 이슬람교도는 시리아, 팔레스티나를 십자군 병사의 지배에 넘겨주고 말았다. 에뎃사를 중심으로 하여 에뎃사 백령이,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하여 안티오키아 후령이, 그리고 예루살렘왕국이, 조금 뒤에는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하여 트리폴리 백령이 성립되었다.

이후 80여년동안 시리아 및 팔레스티나에 거주하게 된 프랑크인은 어느 정도 이슬람 세계에 동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상당히 현실적으로 정세를 판단할 수 있는 심리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서야 광신적인 십자군 열기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구의 새로운 열심당들이 꾸역꾸역 재화가 넘쳐난다는 동방으로 향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문제였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처했던 것이 영화에 등장하는 국왕 보두앵과 티베리아스 백작 등의 견해였다. 그들은 이슬람 세력과 공존함으로서 그들이 구축한 국가를 유지하고 싶었으며 그런 한도내에서 서구의 원군의 도움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영토에 대한 욕망과 중세의 광신을 그대로 지닌 채 약속의 땅에 도착한 서구의 열심당들은 - 기 드 루지앙과 레이날드 등 - 그런 유화책을 증오하였으며 전쟁을 벌여 이교도를 몰아내고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싶어하였다.

이미 전성기를 지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정권은 극도로 쇠퇴하였다.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의 지배자로서 이슬람 실지 회복의 영웅으로 군림하던 군주 누르 엣딘은 그가 신뢰하는 부장 시르 쿠프를 파견하여 파티마 왕조의 정권통제를 맡겼다. 1169년 그는 파티마 왕조의 재상 지위에 올랐으나 곧 병사하고 그의 조카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인물이 바로 이슬람의 지주가 된 사라 앗딘(살라딘)이다.

1171년 파티마 왕조 최후의 칼리프가 숨을 거두자 살라딘은 중망을 업고 술탄의 지위에 올라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 파티마 왕조는 당시 이슬람 주류와는 다른 계열에 속했던 왕조였으며, 살라딘은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충성서약을 함으로서 이슬람 세계 전체의 세속군주로 인정받으려 노력하였다 -

그 2년 후 그의 주군 누르 엣딘이 죽자 그는 다마스커스 및 시리아 방면에 대한 행동의 자유를 선언하고 이듬해 다마스커스를 점령하였다. 대체로 1185년경까지 살라딘은 유프라테스강에서부터 나일강에 이르는 시리아 및 이집트 전체의 통일군주가 되었다. 이제까지 이슬람측의 내분으로 덕을 보고 있던 시리아, 팔레스티나 연해지역의 여러 프랑크인 국가들은 이제 중대한 위기를 맞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아직 얼마동안은 우호 관계가 지속되었지만 메카의 대상을 약탈하는 프랑크측의 경거망동으로 양자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게 영화에 등장하던 루지앙과 레이날드의 대상 습격 장면이다. 1187년 여름 예루살렘 왕국 군은 총력을 다해 갈릴리 지방의 제압에 나섰으나 갈릴리 호수 서안의 하틴 고개에서 살라딘의 군대에 포위되어 염천하에 급수가 끊기고 게다가 화공까지 당해 힘없이 항복하였으며 예루살렘 국왕은 포로가 되었다.



이 하틴의 전투 이후 살라딘은 아콘, 야파, 베이루트를 차례로 공략하고 10월 초에는 예루살렘의 성문 앞에 서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문을 열었다. 88년 전 7만여명의 이슬람교도를 학살한 제 1차 십자군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대조적이었다. 이번에는 살육도 약탈도 파괴도 없었다. 그리스도교도는 남자가 금화 10닢, 여자가 5닢, 아이들은 1닢의 몸값을 지불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빈민이나 전사자의 과부와 고아에게는 살라딘이 사재를 털어 몸값을 지불해 주었다.

믿을 수 없는 대접을 받은 것은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비롯한 그리스도교회의 최고성직자들이었다. 영화에서 개종해서라도 목숨만은 건지려는 추잡한 행보를 보이던 주교는 이들 세속교회의 풍경을 집약한 모습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값만을 지불하고는 금은재보를 짐수레에 산처럼 싣고서 지체없이 물러가고 말았던 것이다. 살라딘의 관용 앞에서 그들의 마음은 부끄럽지 않았을까?

"바위의 대성당" 위에 세워져 있던 황금의 대십자가는 철거되었다. 성벽에는 살라딘의 깃발이 나부꼈다. 성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의 수중으로 회복되었다. 프랑크인은 이제 티루스, 트리폴리만을 영유하게 되었다.

현지 프랑크인의 긴급원조 요청에 따라 역사상 유명한 제 3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붉은 수염"왕, 프랑스 필립 2세 "존엄"왕, 영국의 리처드 1세 "사자심"왕이 이끄는 십자군이었다. 그러나 "붉은 수염"왕은 소아시아 반도의 강을 건너던 중 익사해버렸고, "존엄"왕과 "사자심"왕은 극도의 경계심으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로로 팔레스티나로 향했다.

1189년 이후 현지의 프랑크군은 살라딘이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아콘을 다시 빼앗고자 군사행동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곳에 도착한 두 왕의 군대는 투석기와 사다리 등의 공성무기를 갖고 있었고 프랑스와 영국의 함대는 제해권을 장악하여 해상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살라딘의 원군도 헛되이 수비대는 항복하였다.

프랑스 왕은 영국 왕에게 세력이 미치지 못하자 귀국해 버렸으며 "사자심"왕 리처드는 살라딘과의 협정을 무시하고 포로 2천7백 명을 처형한 후 곧장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변함없는 십자군의 잔학성에 살라딘은 분노하였다.

이후 1192년 9월에 정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살라딘은 리처드 1세와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여 리처드 왕의 중무장기사와 궁수대의 협동작전에 늘 고전하였지만 전략적으로 리처드 군의 움직임을 잘 막아냄으로서 결국 예루살렘 성벽에도 접근치 못하게 방어하였다.

살라딘은 팔레스티나 연해지역의 지배권과 성도 예루살렘으로의 순례통행권을 3년간에 한해 프랑크인에게 인정해 주었다. 이듬해 살라딘은 다마스커스에서 세상을 뜨고 "신" 예루살렘 왕국은 다시 1세기 정도 존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 팔레스티나에서의 "프랑크인",즉 서방 그리스도교도의 위협은 사실상 여기서 소멸되었다.

그 후로도 수 차례에 걸쳐 십자군 원정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후 십자군의 행보는 탈선과 헤프닝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제국을 침략하고 광신과 무지의 합작품인 소년십자군의 비극을 일으켰으며, 서구 각 국가 국왕의 야심에 의한 독자적 십자군 출병은 무익한 전투만 계속했을 뿐 성과가 없었다.

이후 1250년에 이집트의 술탄이 투르크 용병에 의해 쫓겨나게 되고, 살라딘이 세운 아이유브 왕조 대신에 마물루크 왕조가 성립되었다. 마물루크 왕조는 시리아로 대군을 파견하였고, 안티오키아 제후국은 1268년에, 트리폴리 제후국은 1289년에, 잔존한 최후의 기독교도의 거점 아콘도 또한 1291년에 상실됨으로써 서유럽의 기독교도들은 근동의 이슬람세계에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다.

이것이 십자군운동의 종말이었다...

by 붉은10월, 2005-05-13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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